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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셰익스피어의 생애와 그 시대의 영국

by 길쓸별 2022.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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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1616)

영국의 극작가이자 시인, 희극, 비극, 사극을 포함하여 희곡 37편과 장편 서사시 2, 그리고 소네트 154편을 쓴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만큼 자주 상연되고, 많은 나라의 독자를 확보한 작품은 없다. 셰익스피어는 400년 전의 관객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극을 썼지만, 그 극들은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도 변함없이 감동을 준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이처럼 오랫동안 폭넓은 사랑을 받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인간의 본성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제대로 표현해낸 작가의 능력이다. 셰익스피어는 개개인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모든 인가니 가진 본성을 그려냈다. 그러므로 시공(時空)을 초월한 인물들을 창조할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가 사랑을 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방대한 분야에 대한 엄청난 지식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음악, 법률, 성경, 군사 전략, 미술, 정치, 대양, 역사, 사냥 등에 대한 지식을 작품 속에서 마음껏 과시하고 있다. 마음속에 생생한 그림이 떠오르도록 하는 훌륭한 언어와 뛰어난 이미지 처리 역시 작품이 사랑받는 또 다른 이유이다.

어떤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너무 찬미한 나머지 그런 작품을 쓴 작가가 한낱 스트랫퍼드 같은 작은 마을 출신의 평범한 시골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귀족이나 상류층의 고학력자가 아닌 사람이 그런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스트랫퍼드 출신의 대학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 대신 자기들의 생각에 들어맞는 훌륭한 사람을 그 작품들의 작가로 내세우려는 연구가 특히 19세기에 활발했다. 그중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 사람은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다. 또 동시대 극작가인 크리스토퍼 말로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4절 판으로 처음 출간되었다. 그러다 동료 배우였던 존 헤밍즈와 헨리 콘델의 노력으로 2절 판(First Folio) 전집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운 판이 출간되고 있어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생애>

셰익스피어는 1564423,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이라는 작은 상업 도시의 중산층 가정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마을 유지로 읍장 등 여러 공직을 지냈다.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셰익스피어는 7세 때부터 마을의 그래머스쿨(문법학교)을 다녔던 것 같다. 여기서는 주로 라틴어 공부를 했으므로 이때 키케로, 오비디우스, 플라우투스, 세네카. 테렌티우스. 베르길리우스 등 고대 로마의 훌륭한 작가들의 글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13세쯤 되었을 때부터 가세가 기울어 대학에는 진학하지 못했다.

1582년에 셰익스피어는 18세의 나이로 8세 연상의 앤 해서웨이와 결혼했다. 이듬해 장녀 수재나를 낳았고 1585년에는 쌍둥이 남매를 낳았다. 이때부터 셰익스피어가 런던의 연극계에서 유명인이 된 것으로 여겨지는 1592년 사이의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어쨌든 1592년에 셰익스피어는 이미 런던에서 일류 배우 겸 극작가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대학 출신의 극작가였던 그린(Robert Greene)이 쓴 편지로 알 수 있다. 이 편지는 대학 교육도 받지 않은 배우 출신의 셰익스피어가 극을 쓰는 것을 비난하는 내용이다.

1594년에 셰익스피어는 궁내부 장관이었던 챔벌레인 부자(父子)를 후원자로 한 궁내부장관극단(Lord Chamberlain’s Men)의 주주가 되었다. 이 극단은 당시 런던에서 매우 인기 있는 극단 중의 하나였는데, 여기서 셰익스피어는 배우 겸 극작가로서 극단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 이 극단은 후에 제임스 1세가 즉위했을 때 왕의 허락을 받아 왕의 극단(King’s Men)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제임스 1세를 위한 작품을 정기 공연했다.

공연 작품들의 횟수나 출간한 책의 부수로 미루어보아 셰익스피어는 1594년부터 1608년까지 런던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극작가였던 것 같다.

1599년에 셰익스피어 외 여섯 명은 런던 근교에서 가장 큰 야외극장인 클로브극장을 설립했다. 왕의 극단은 이미 다른 극단이 필적할 수 없을 만큼 성공을 거두어 런던 최고의 극단이었다. 1608년에는 블랙프라이어스라는 실내 극장까지 장기 임대하여, 겨울에는 인공조명이 있고, 난방장치가 되어 있는 이 극장에서 공연하고 여름에는 글로브극장에서 공연했다.

만년에 셰익스피어는 런던을 떠나 스트랫퍼드에서 살았다. 생전에 이미 극작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셰익스피어는 부유한 만년을 보내다가 1616423일에 세상을 떠났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영국>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문화·사회·정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을 알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유령이나 마녀, 마법사 등의 존재를 믿고 있었는데,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것들을 작품 속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유령은 <햄릿 Hamlet>, <줄리어스 시저 Julius Caesar>, <맥베스 Macbeth>, <리처드 3Richard III>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마녀는 <맥베스>의 주요 인물로 나온다. <템페스트 The Tempest>의 프로스페로는 마법사이다.

16세기 말에 셰익스피어가 희곡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영국인들은 삶에 대해 낙관하는 경향이 있었다. 1588년에 영국해군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물리치자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아래 안정적으로 살던 영국인들은 더욱 안정감을 갖게 되고 아울러 애국심이 고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주의는 급속히 퇴색하여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한 1603년 무렵에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닥쳐왔다. 영국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 이 세상은 잡초만 무성하게 자란 정원, 더럽고 흉물스런 것들만 우글대네.”(12)와 같은 햄릿의 대사처럼 세상이 타락해간다고 생각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보면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가 이렇게 낙관주의에서 비관주의로 옮겨간 사실을 알 수 있다. 초기의 작품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과 같은 비극에서조차 기쁨이 충만함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1600년 이후의 작품에서는 혼란스럽고 암울하며, 사회에 대해 냉소적인 면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4대비극을 쓴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심지어 <자에는 자로 Measure for Measure>, <끝이 좋으면 다 좋아 All’s Well That Ends Well>와 같은 희극 작품에조차 초기 희극에서는 볼 수 없었던 비통함이 담겨 있다. 셰익스피어는 당시 사람들에게 만연해 있던 불안감을 <리어왕 King Lear>에 나오는 아이들이 재미로 파리를 죽이듯이 신은 장난삼아 우리를 죽인다.”라는 대사로 표현했다.

 

본 내용은 <최봉수/2007/21세기 웅진학습백과사전/웅진(전집)출판부(웅진다책)/1권>을 참고하여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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